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6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이 요즘 아끼는 우리말 '떨구다'는 겸손, '드러내다'는 솔직, '털다'는 달관의 미덕을 각각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 정신의 경지는 나목(裸木)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절망하기보다는, 벌거벗었기에 더 감각이 예민해진 실존의 상징을 떠올리면서 삶이 지속되는 한 무감각해지는 것을 끝까지 경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감각은 시 '외등(外燈) 불빛 속 석류나무'에 쓴 '간지럼 타는 눈송이의 살갗/ 어둠 속에서/ 그 간지럼 전하는 공기의 미진동(微振動)'처럼 섬세한 의식의 촉수로 포착한 심상(心象)으로 드러난다. 그의 또 다른 겨울 노래는 '몸이 말한다'이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을 동네 병원에서 맞은 뒤 끙끙 앓고 나서 쓴 시다. '이제 감기 몸살하고도 인사 한번 나눠야 않겠나/ 빨리 가라고 자동차에 매질 않지만/ 재갈 물린 말은 채찍을 들어야 말처럼 달린다'며 노년의 건강한 해학을 풀어놓았다.
이처럼 자연의 겨울과 인생의 겨울을 버무린 시집 속에는 연작시 '연옥의 봄'도 들어 있다. 기독교에서 연옥(煉獄)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장소를 가리킨다. 세속에서 죄짓고 온 인간 영혼이 고통을 겪고 정화되면 천국의 문으로 간다고 한다.
황동규 시인은 현존하면서도 연옥에 있다고 상상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오랜 친구들이 잇달아 세상을 뜨면서 허탈한 고통을 자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히 죽음을 다룬 시를 자주 쓰면서 현실도 초현실도 아닌 정화계(淨化界)를 체험했기에 지금-이곳은 연옥이기도 하다. 종교적으로 연옥은 명계(冥界)이므로 황폐하고 어두운 겨울의 이미지에 가깝다. 문학적으론 고통의 승화가 향기롭게 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노년의 삶을 '연옥의 봄'이라 부른 모양이다.
시인은 또 다른 겨울 노래인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에서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을 무대로 삼은 극(劇) 서정시를 펼쳐놓았다. 눈바람에 기차 소리마저 얼어붙는 겨울밤, 외딴 술집에서 형광등 불빛 아래 시인의 분신 같은 어느 사내가 홀로 술을 마신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떨치기 힘든 것은/ 이런 뜻 없는 것들'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래도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게/ 이 저체온(低體溫)의 슬픔, 이런 뜻 없는 것들이 아닐까'라고 덧붙인다.
시인이 패배적 허무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는 평소 감상(感傷)을 경계하면서 언어와 정서의 지적(知的) 통제에 바탕을 둔 서정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육체의 삶이란 어차피 덧없기에 슬프다. 하지만 시인의 정신은 '이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저체온의 슬픔'을 놓지 않으려 한다. 꼼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슬픔이다. 그것이 '저체온의 슬픔'인 까닭은 가혹한 운명의 겨울에 맞선 인간 육체의 하찮은 온기(溫氣)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기운을 통해 정화된 영혼의 언어를 시집에 남긴다. 독자가 그 책을 음미하면서 상상하는 겨울의 밤하늘은 성(聖)스러운 슬픔의 흔적으로 아롱진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